2014.05,17~18. 5월의 녹음을 만끽하며 백담사~영시암~오세암~봉정암을 가다(1)

2014. 5. 21. 13:47성지순례

 

 영일암 신도 15명이 스님 두 분을 모시고 설악산에 위치한 백담사~영시암~오세암(1박)~봉점암~영시암~백담사 코스로 진행된 1박 2일간의 뜻깊은 성지순례를 했다.

 

 <백담사 계곡>

 

 

 

<영시암 가는 길>

 

 <맑고 투명한 계곡물 보다 더 맑고 고운 연화스님>

 

<영시암>

  

<오세암을 향하여,,,>

 

<거목의 기를 받으며...>

 

 

<만경대에서 바라본 비경>

 

 

 

<오세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절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ㆍ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고, 옛 절터가 근처에 있어 석물(石物)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마등령이 있다.       오세암 [五歲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췌

 

 

 

<삼성각>

 

<동자전 ... 전설의 오세 동자 스님을 모신 전각>

 

<시무외전...천수천안 관세음 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 뒤로보이는 바위가 관음봉과 동자봉이라고 한다 >

 

 

<오세암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의 모습... 큰 봉우리 가운데 부처님 모습의 바위도 보이고...>

 

<천진관음보전>

 

<백의관세음보살>

 

<동자스님이 따라주는 감로수...정말 시원하고 맛있다>

 

<어둠이 드리워진 오세암과 만경대 ... 저녁예불에 참석하여 108배를 올리며 백의관음보살님께 참배하고...>

 

<하룻밤 묵게될 숙소 ... 1박에 1만원 ... 때에 따라 묵게될 인원수가 달라진다. 우리는 28명이 배정되었다. >

 

<다음날 아침 4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법당 참배하고 6시 아침공양 후 주먹밥을 받아들고 봉정암으로 출발~~>

 

 

<팔순을  넘기신 법운스님 ... 신도들이 걱정되는지 봉정암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니 고마움에 앞서 걱정이 되었다>

 

<한 고개를 넘을 때 마다 고갯마루에서 땀을 식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은지 먹을 것을 요구하는 다람쥐...>

 

<힘들다 힘들어... 지금이 몇고개째냐?...여덟고갠가? 아홉고갠가?>

 

  

<지쳐갈 무렵 눈이 확트일 절경에 다시 힘이 솟고...>

 

  

 

 

 

<마지막 고개에 도착했나보다 하늘문이 열렸네...>

 

<온 길을 뒤돌아보니 까마득...>

 

<봉정암 문턱에 도착...일단은 쉬고 보자...>

 

 

 

<부처님 뇌사리가 모셔진 봉정암석가사리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1호. 높이 3.3m. 설악산 대청봉 밑에 있는 봉정암 옆의 능선 위 거대한 암석 위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선덕여왕 12년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탑의 형식은 신라의 전형양식(典型樣式)과는 달리 기단부(基壇部)를 생략하고 거대한 암석의 정상을 다듬어 모난 2단의 높고 낮은 탑신(塔身)받침을 조성하고 받침 밖으로 16판(瓣)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을 돌려 새겼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다른 돌로써 이루어졌으며, 1층옥신에는 네 귀에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있고 2층옥신부터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너비가 좁고 두터운 편으로 밑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있다. 추녀는 전각(轉角)에서 반전(反轉)되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여 고려석탑양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에 큼직한 원뿔형의 보주(寶珠)가 놓여있다. 결손된 부분이 없는 완전한 형태의 석탑으로 주변의 웅장한 산세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봉정암석가사리탑 [鳳頂庵釋迦舍利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췌

 

 

 

 <진신사리탑 주변에서 내려다 본 부처바위와 어우러진 봉정암의 전경>

 

 

 

 

<봉정암 >  강원 인제군 북면 설악산(雪嶽山:1,708m) 소청봉 북서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고도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 .  봉정암 [鳳頂庵] (두산백과)에서 발췌

 

 <산신각>

 <다라니전각>

 

<거대한 바위 아래 위치한 대법당>

 

 

 <법종각>

 

<종무소>

 

 

 

<아직 못 올라온 도반들이 무사히 도착하길 애타게 기다리며...>

 

<산사에서 제공되는 식사 ...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저 이 공양을 받습니다">

 

<하산길은 2편에서...>